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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을 피해 이동한 경로를 함께 다라가며 흔적과 유적을 찾았습니다. 처음 찾은 곳은 홍커우 공원이었습니다. 이곳은 윤봉길 의사가 수통 폭탄을 던진 곳으로 유명합니다. 많은 분들이 도시락 폭탄을 던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 던진 폭탄은 수통모양의 폭탄이었습니다. 당시 쇼와 덴노의 생일행사에 들고 들어갈 수 있는 물건이 수통과 도시락이었기 때문에 수통형 폭탄과 도시락 폭탄을 제작했고 실제 던진 것은 수통형 폭탄이었습니다. 이 수통 폭탄으로 상하이 거류민단장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리영희선생님의 정리를 끝으로 방씨들의 끝도없는 비리를 대충 끝내겠다. 손가락만 아프다. “(역대정권은) 권력의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고, 그들의 범죄를 ‘반공’으로 정당화하며, 그들의 사리사욕을 ‘애국충정’으로 칭송하는 ‘언론인’들이 필요했다. 광주에서의 양민 대학살을 ‘국가 안보적 합법행위’로 감싸주고,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인사들의 목을 조르는 온갖 야만적 탄압행위를 ‘빨갱이 잡기’로 정당화해주는 ‘언론사’와 ‘언론인’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소위 ‘언론사’와 ‘언론인’은 그 요구를 충실히 수행해 왔다. 범죄적





방일영은 방응모의 손자다. 그 사이에는 방재윤이 있다. 방재윤은 방응모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사실은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본래 방일영의 아버지 방재윤은 방응모의 조카다. 그러나 방응모가 아들이 없어서 조카를 양아들로 삼은 것이다. 방응모가 양자로 들인 방재윤이 방일영, 방우영 형제를 낳고 1940년에 사망하였다. 그런데



상해에서 거행된 일왕의 생일잔치에서 폭탄을 던져 여러명의 일본군 고위간부를 폭살하자 장개석총통은 중국의 100만대군이 이루어내지 못한 일을 한명의 조선청년이 해냈다 라고 감동하고, 그 이후부터 한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카이로 회담에도 (김구선생님의 부탁으로)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 하고, 포츠담선언에도 참석하여 카이로회담에서 명문화 했던 내용을 전부 수용하도록 힘쓴 결과 결국 한국의 독립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만의 장년층이 한국을 좋게 생각치 않는 이유도



만주지방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진 무장투쟁은 거의가 항일 빨치산들에 의한 것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좌익계열은 1928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노선’에 따라 중국공산당 휘하에 들어갔고, 그들과 연대해 만주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軍)으로 일컬어지는 부대가 그것이다. 당시 실제로 동북항일연군에는 중국공산당원 뿐 아니라 조선인이 상당히 많았으며 고위간부에 특히 조선인이 많았다. 일제에 일찍 짓밟힌 탓에 항일투쟁도 중국인보다 훨씬 앞서 나갔기 때문인것 같다. 내가 아는 바로는 동북항일연군은 당시 여러 차례에 걸친 조직개편 끝에 활동지역에 따라 최종적으로 1로군(東南滿지역, 총지휘 양정우), 2로군(吉東지역, 총지휘 주보중), 3로군(北滿지역, 총지휘





면을 빛(레이져)으로 조사시켜 굳히는 방식으로 제작합니다. * 출력이 완성되었습니다. 이후 후가공 및 도색을 진행합니다!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유튜브에 올려져있는 수많은 영상과 관련 자료를 읽었고 이를 토대로 윤봉길의사님의 모습이 잘 표현할수있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25살의 젊은 영웅, 윤봉길 의사를 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피투성이 만신창이되실때까지 일본에 항거하며 목숨바쳐 대한의 독립을 외친 독립투사들의 정신을 현시대에도 잊지말자는 취지였는데 댓글들 일부는 "윤봉길의사가 아닌거로아는데?" "어그로끌어 베스트 가보려는거아니냐" 등의 항의성? 댓글도 몇몇보였습니다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지금도 토착왜구는 부들부들하겠지요? 베스트 글의 베스트 댓글이 잘못 되어있어 올립니다. 롯데 신격호의 장인이 바로 이 자입니다. 시게미쓰 마모루. 당시 일본 외무상이자 전권대사. 전권대사로서 제일 마지막에 싸인을 하죠. 군복을 입지않고,



30주년을 맞은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 윤주경 관장이 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제공=독립기념관] 한국당은 31일 인재영입 행사를 갖고 박 전 대장을 비롯한 10명가량의 영입 인사를 발표할 예정이다. 영입 인사엔 이진숙 전 대전 MBC 사장,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 등도 포함됐다고 한다. 윤 전 관장은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다. 2014년 9월 취임한 윤 관장은 당시 임기를 두 달 남긴 2017년 7월 사임했다. 당시 윤 전 관장은 “2017년 7월경 국가보훈처에서 찾아와 ‘ BH (청와대를 지칭) 뜻이니 일주일 안에 사표를 내 달라’고





적군에 편입해 각종 지원을 받되, 항일연군 조직을 그대로 유지해 독자적 위상을 갖도록 결정됐다. 항일연군측의 주장이 많이 반영된 셈이다. 이 과정에 소련측의 대표자였던 왕신림(王新林·일종의 암호명으로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사람이 바뀔 때마다 제2대 왕신림, 제3대 왕신림으로 불렸다)이 교체되는 혼란을 겪기도 했다. 88특별여단의 주요 지휘부는 여장 주보중 소좌(후에 중좌로 승진), 정치 부여장에 이조린 소좌, 부여장 시린스키 소좌, 참모장은 샤마르첸코 소좌, 부참모장은 최용건 대위로 사령부가 구성됐다. 단위 부대로 제1교도영은 1로군을 기초로 편성돼 영장 김일성 대위,





등은 이런 배경으로 이후락 5인방으로 불려졌고, 물론 그 주변에는 방일영이 있었다. 여기에 방일영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던 SK 창업자 최종건이 빠지면 안된다. 수원지방의 별 볼 일 없는 직물회사였던 선경이 급성장한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종건은 죽는 순간까지 조선일보 사외이사였다. 방일영은 박정희대통령을 '대통령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의 삼촌인 방재선의 증언이다. “대통령 형님, 한잔 쭈∼욱 드십시오.” “내가